
‘외식업 비주얼 디렉터’라는 직업이 있다. 푸드 산업 전반에 걸쳐 컨설팅과 디렉팅을 맡는다고 한다. 외식업 비주얼 디렉터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듣기 위해 식공간 디자인 그룹 ‘꾸밈’ 김민지 대표의 작업실 ‘꾸밈 휴게공작소’를 방문했다.
마포에 자리 잡은 ‘꾸밈’은 흡사 그릇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김 대표가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사 모은 진귀한 그릇과 소품들이 천정에서 바닥까지 벽면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김 대표는 9월 2일 방송된 KBS 1TV ‘한국인의 밥상 - TV의 맛, 세상을 위로하다’ 편에 출연해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음식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기도 했다.

즉 브랜드의 스토리와 그에 따른 공간을 만들고 메뉴를 개발할 뿐만 아니라 더 맛있어 보이도록 식기를 고르고 플레이팅 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일을 강의와 컨설팅으로 진행하는 것이 나의 업무 영역이다. 그러나 현장 경험이 줄어들면 감각도 퇴화하기 마련이라 지면작업 외 영화, 드라마 촬영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촬영은 대본을 이해하는 것부터 그 외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조선 시대의 식기만 해도 목기, 유기, 은기, 도자기 등이 있고 도자기 역시 시대에 따라 분청, 철화, 순백자, 상감백자, 청화, 진사 등이 유행했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이를 담아내는 소반 역시 지역적 특성이 있고 주칠이나 자개 등으로 꾸미기도 하니 의식주 전반에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에 건축, 가구(앤틱), 도자사, 미술사, 꽃꽂이, 식 문화사, 복식사까지 다방면에 걸쳐 공부하며 프로젝트에 따라 전문가들과 함께 팀을 꾸려 활동하고 있다.

처음에는 스승, 동료들과 테이블 세팅 관련 전시를 많이 했다. 2006년에는 오사카 니조 성에서 한일 통과의례 상차림을 양국의 푸드코디네이터가 비교하는 뜻깊은 전시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시스트로서 TVC(TV Commercial) 푸드 스타일리스트, 케이터링 쪽 경험도 많이 쌓았다.
영화는 2007년 ‘모던보이’로 입봉했고, 미술팀에 있던 친구 덕에 어시스트 경험 없이 바로 ‘실장’ 직함을 달고 영화판에 투입되었다. 당시만 해도 전문 푸드 팀의 필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던 시기였기에 경쟁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지금은 이런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를 매우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TVC와 달리 각자의 전문분야를 인정해 주는 점이 마음에 들어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일했다. 이때 미술감독이 의상감독으로 유명한 조상경 감독이었다. 미팅 시 필요한 자료를 묻기에 현장 헌팅 사진과 배우들 의상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더니 그 이후부터 음식과 테이블 세팅은 나와 먼저 의논하였다.

TVC 일을 그만둔 것은 4~5년쯤 된다. 현장에서 소모품처럼 쓰이는 분위기, 열악한 환경, 푸드 포르노가 갖는 한계에 자괴감이 들었다. 물론 나를 기억하고 함께하길 원하는 오래된 클라이언트들과는 꾸준히 작업을 이어갔다. 그분들은 내게 메뉴 사진 외에도 식기 선택, 플레이팅 교체 등 안목을 필요로 하는 일들을 부탁해왔다. 이 일은 차츰 테이블을 바꾸거나 조명을 바꾸는 등 인테리어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엄마의 공책’은 치매를 다룬 따뜻한 영화인데 덕분에 환경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만남도 갖고 서울과 부산의 음식영화제 두 곳에서 개봉하기도 했다.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자면 2015년 작업인 ‘아가씨’를 들 수 있다. 존경하는 류성희 미술감독님이 ‘암살’에 이어 다시 나를 찾아 준 작품이었고, 역시나 존경에 마지 않는 박찬욱 감독님과도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고무되었다. 류 미감님은 내가 제안한 몇 가지의 디자인 중 본인과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으면 늘 감독님께 컨펌을 받았다.

영화 ‘나랏말싸미’ 작업도 류 미감님과 함께 했는데 미감님이 생각하는 공간에 딱 맞는 상차림과 음식을 만들기 위해 참 많이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박찬욱 감독 역시 내가 함께 작업하고 싶은 탑5 감독님 중 한 분이시다.
“감독님, 코우즈키(조진웅 분)는 뼛속까지 일본인이고 싶은 사람인데 왜 소바나 우동이 아닌 평냉을 먹을까요?”
내 질문에 감독님은 아주 친절하게 대답해주셨다.
“음, 그건 코우즈키가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미 체화되어, 바꾸고 싶어도 잘 안되는 것 중 으뜸은 입맛이 아닐까 해요.”

단단한 고증 위에, 대본을 쓴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도록 상상력을 더하고, 연출 감독, 미술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만드는 게 나의 일이다. 궁극적으로는 내 작업이 배우들의 연기에 도움이 되어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나의 직업적 사명이다.
내가 제대로 고증해서 재현하면 100년 뒤에라도 누군가 도움을 받을 것이고 가깝게는 내 후배들이 참고할 것이다. 한국영화가 이토록 발전한 것은 앤딩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분야에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아닐까.
외식 업장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컨셉이 중요하다, 입지가 중요하다, 스토리 텔링이 중요하다, 이제 트렌드는 밀키트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지만 식음 공간은 결코 단편적인 슬로건으로 완성될 수 없다. 테이블 세팅 전문가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는다면 방법론적으로는 첫째, 테이블 아이템들이 디자인적인 통일을 이루고 둘째, 실용적이면서 심미성을 충족시키는 테이블 디자인이어야 하며 셋째, 디자이너만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공간을 완성 시키는 것은 사람이다. 식사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한 식음 공간의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팀 못지않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우리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아직 낮은 편이다. 누가 해도 상관없는 일, 심지어 “그 영화에 음식이 나오던가?”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다. 커리어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다 보니, 해서는 안 될 일들을 벌이곤 한다. 선배의 일을 가격을 낮춰 가로채는 후배도 있고, 대본에 대한 이해 없이 제작팀의 오더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음식을 딜리버리 하는 친구들도 있다.
나는 이 분야에서 더 많이 인정받고, 몸값을 더 많이 올리고 싶다.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높은 위치에서 존경받으며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게 내 꿈이다. 외식업 분야에서도 이 일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인테리어와 메뉴 사이를 잇고, 공간의 완성도를 높여 또 오고 싶은 장소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른다. 일반 업자들이 하는 일과, 내가 하는 맞춤형 인테리어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니 무형의 가치에 박한 것이 현실이다.
매체 노출을 자제해 왔던 내가 ‘한국인의 밥상’ 출연을 결심한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시대극의 백숙 장면 연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에 주변 사람은 물론 ‘한국인의 밥상’ 시청자들이 많은 공감을 표해주어서 매우 감사했다.

작년 겨울에 작업한 ‘킹덤 아신전’의 경우 영화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아 해볼 만했다.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니 플랫폼이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음식 드라마가 나올 때도 됐다. 재작년 중국 화이사에서 진행한 ‘혀끝의 두근거림’에 참여하기 위해 4개월간 한국 요리사 2명, 중국 요리사 3명. 스타일링 팀 3명과 함께 상해에 머물렀다. 제작사는 현장에서 쓸 조리용 탑차와 메뉴 개발을 위한 주방을 제공하고, 중국요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미슐랭 식당 투어를 진행하기도 했다.
배우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열거나, 씨즐 장면은 전문 팀에 맡겨 따로 편집하는 모습을 보며 참 많이 부러웠다. 우리나라도 ‘음식’이 아주 중요한 영화, 드라마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제대로 투자가 이루어질 것이고 보다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음식 영상이 나올 테니까. 물론 디렉팅은 ‘꾸밈’이 맡아야 할 것이다. 디자이너를 넘어 아티스트로서 드라마, 영화, 외식업 디렉팅 어느 분야건 우리 상차림에 다양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나의 사명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온고지신과 인문학적인 사유다. 미래를 획득하려면 과거를 성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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