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욜드(YOLD)=윤경숙 칼럼니스트] 한 언론기사를 보니 요즘 결혼식장은 축복의 무대라기보다 정산의 창구에 가깝다. “호텔이면 +5만 원”, “같은 팀이면 10만 원”, “모바일 청첩장이면 0원.” 사랑의 약속 앞에 붙는 숫자표다. 축하하러 가기 전, 우리는 이미 머릿속에서 손익계산을 끝낸다.
결혼은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선언의 중심에 사람이 아니라 봉투가 놓였다. 식대가 8만 원이면 5만 원은 민폐인지, 10만 원은 체면인지 따진다. 신랑신부는 “적자면 어떡하지”를 걱정하고, 하객은 “밥값은 해야지”라는 압박을 느낀다. 사랑의 출발선에 계산기가 먼저 올라와 있다.
원래 축의금은 시작을 돕는 씨앗이었다. 농경사회에선 쌀을 보탰고, 서양에선 빵과 동전을 건넸다. 공동체가 “당신들의 새 살림을 우리가 함께 책임지겠다”고 손을 내민 것이다. 핵심은 액수가 아니라 연대였다. 돈은 마음의 형식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지금은 순서가 바뀌었다. “축의금으로 식대 충당되겠지?”가 먼저다. 결혼이 사랑의 결단이 아니라 손익 구조처럼 말해진다. 축의가 응원이 아니라 회수처럼 느껴지는 순간, 축하는 부담이 된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이 어색해지고, 친구 사이가 금액으로 갈라진다. 봉투 두께가 관계의 두께를 대신하는 기묘한 풍경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예식 비용은 치솟고, 청년 세대의 형편은 팍팍하다. 축의금이 실제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움과 의존은 다르다. 결혼식의 목적이 흑자라면, 그날의 박수는 계산서가 된다. 사랑의 약속이 ‘투자 대비 수익’처럼 들리는 순간, 이미 본질은 흔들린다.

축의금은 세금이 아니다. 법도 아니다. 관습이다. 관습은 시대에 맞게 바뀔 수 있다. 초대는 강요가 아니고, 참석은 빚이 아니다. 주는 사람은 형편껏, 받는 사람은 감사로. 그 단순한 원칙이면 충분하다. 결혼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행사가 아니다. 두 사람이 세상의 무게를 함께 지겠다는 다짐이다. 축의금은 그 다짐에 보내는 응원이어야 한다. 응원이 부담이 되는 사회라면, 우리는 지금 결혼을 축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고 있는지 모른다.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결혼을 보러 가는가, 아니면 정산하러 가는가. 봉투의 숫자가 아니라 눈빛의 진심이 남는 문화,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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