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그 역(페트로니우스)을 맡았을 때 솔직히 불만이었습니다. 배역을 맡아도 참 더러운 역을 맡았다고 생각했죠. 그도 그럴 것이 개그맨이라면 당연히 웃겨야 뜨는데, 충신 캐릭터로는 웃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코너 진행 내내 내뱉는 대사라고는 고작 ‘폐하 아니되옵니다’ 밖에 없는데 어떻게 웃길 수가 있겠어요. 대사가 좀 더 길어봤자 단어 몇 개 얹어 ‘폐하께서는 로마의 앞날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정도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요.”
힘들게 로마시대 분장을 한 채 짧은 대사 하나만 맡은 채 우두커니 서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에게 우연찮게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코미디 하이웨이’라는 다른 프로그램의 녹화 대기실에서 동료들과 농담하며 넋두리하는 모습을 ‘쇼 비디오자키’의 담당 PD가 우연히 엿보게 된 것이다. 먼저 정명재가 만취한 여자 목소리로 말은 던진다.
(정명재) 개그맨 아저씨들, 나 이런 데 있다고 깔보지마~
(상대방) 깔보긴 누가 깔봐, 아가씨 많이 취했구만.
(정명재) 그래 나 많이 취했다. 소주 두병 깠지, 또 양주 큰 거 두병 깠지, 또 맥주 두병 깠지...오빠, 미안해~ 자꾸 까는 소리만 해서.
술 취한 여인에 대한 관찰력은 학창시절 쌓여진 것이다. 고등학교 당시 자신의 집에 세 살던 부부가 있었는데, 일용직이던 남편이 매일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고, 아내 역시 술 한잔 걸치면 자신의 신세를 고등학생이던 정명재에게 하소연하곤 했다고 한다. 그때의 분위기가 ‘네로 25시’에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

“폐하 아니되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로마 시민을 우롱하는...”
대사가 끝나기 전에 네로가 뒷통수를 내리치며 핀잔을 준다.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마, 재수 없어, 나가 마!”
정명재가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간다. 술 취한 명분을 주기 위한, 평소와 다른 연출이었다. 그리고 다시 콩트가 이어지려고 하는 찰라에 빨갛게 코가 삐뚤어진 정명재가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폐하~”
“아니, 페트리우스 왜, 왜 그래?”
“보면 몰라! 나 한잔 꺾었다. 왜, 아니꼽니~ 사람이 그러는 게 아냐!”
“미쳤구나, 페트리우스”
“그래 나 미쳤다. 니가 잘나서 왕 됐냐, 부모 잘 만나서 왕 됐지, 당신 나 깔보지 마! 나도 내 동생, 학교 졸업하면 이 생활 땡이야.”
로마 황제가 어이없어 하며, 달래듯이 묻는다.
“페트리우스 도대체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아, 우리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갑자기 아버지가 왜 원망스러워, 임마~”
“우리 아버지가 슈퍼마켓 망하지 않았으면, 내가 왜 니 밑에 있니!”
“뭐, 니, 니 밑에.”
“그럼 내가 니 밑에 있지, 니 위에 있니? 아 술 댕겨, 언니 여기 골뱅이 하나 추가해줘요.”
진짜로 술 마시고 연기하는 것 같다는 호평과 함께 단박에 반응이 왔다. ‘내 동생 학교 졸업하면 이 생활 땡이야’와 함께 ‘언니, 여기 골뱅이 하나 추가요’가 유행어로 뜨며, 장안의 골뱅이 안주 품귀현상과 함께 골뱅이 통조림 가격이 오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연예계 입문 이래 처음으로 CF까지 찍었다. 롯데제과에서 나온 블랙블랙 껌 광고였는데, 졸리울 때 씹는 껌이라는 컨셉이었다. 술 취해 운전대 잡는 부분이 심의에 걸려 음주 연기 더빙을 다시 해야 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그렇게 잘 나가던 개그맨 정명재가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과 마주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1995년 이벤트 회사를 차렸는데, 1997년 IMF를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접게 됐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개그계에도 세대 교체 바람이 일며 무대에 자신이 설 빈공간이 보이지 않게 된다. 정명재는 여의도를 떠나 경기도 고양으로 이사했다. 고양경찰서 인근 지도공원 앞에 ‘네로 25시’라는 생고기 전문점을 차렸다. 직접 고기를 손질하며, 손님상을 돌며 유쾌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띄워 지역에서 꽤 명성이 높았다.


본인도 더는 견딜 수 없어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갈 생각에 운영하던 식당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코로나로 옴짝달짝 못하게 된 상황이 됐다. 사실 미국에 갔다고 해도, 지인 하나 없는 곳에서 영어도 안 되니, 버틸 자신이 없기도 했다고. 결국 그는, 2020년 집 근처에서 새로운 식당을 열었다. 이번엔 ‘네로 25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명마루’라는 식당이다. 테이블이 6개 남짓. 국내산 생고기와 함께 쭈꾸미와 제육볶음, 코다리 안주를 내놓는다. 계란찜도 맛있다고 자랑한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옛날에는 잘 나갔는데 우울증이 오지 않냐?’고 묻는 손님도 있어요. 그런데, 가게가 작은 게 장점이 많아요. 일단 망해도 별로 까먹을 게 없다는 점이죠. 지금은 미국에 학비를 보낼 부담이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살려고만 합니다.”

“명마루 정명재. 위 사람은 평소 투철한 책임감과 건전한 사업정신으로 타의 모범이 되었음은 물론 마약밀매, 하우스방, 또는 불법 성인 사이트 등을 운영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숱한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인류의 건강증진을 위하여 음식점을 선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성을 담긴 식사와 질 좋은 고기를 사용함으로써....”

막걸리는, 그가 직접 그린 복돼지와 여인의 나신이 각각 새겨진 양은주전자에 따라마실 수 있다. 복권을 샀을 때 복돼지 주전자를 선택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여인의 주전자에 손넣고 술을 마시란다. 메뉴판에는 국제삼겹살연맹이 권하는 인기메뉴인 삼겹살 정식과 뒷고기 정식(각각 1만7천원)이 적혀있고, 술안주로는 세계보건기구(WHO)가 권하는 제육볶음안주+계란찜(2만6천원), 쭈꾸미안주+계란찜(2만6천원), 코다리안주+계란찜(2만5천원)을 추천한다. 한눈에도, 저렴한 가격에 한 잔 하기에 딱이다. 인터뷰 중 단골인 듯한 손님 한분이 제육을 주문한다. 소맥 한잔 곁들이며 인터뷰를 하던 주인장이 벌떡 일어나 상추 바구니를 손에 쥐고 손님상으로 간다.
“상추밭에서 키운 상추입니다.”
“상추를 직접요?”
“아니요, 키우는 사람이 키운...”

실 없는 유머에 자지러진 손님상을 뒤로하고 돌아왔다. ‘네로 25시’에서의 리얼한 주당연기에 대해 묻고 답하던 차였다.
“저를 굉장한 술꾼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사실 술을 즐기기는 하지만,한달에 1~2번밖에 안 마시구요, 저만의 음주 철칙도 있습니다. 낮술을 마시지 않고, 혼자서는 안 마십니다. 특히 속상할 때는 술을 멀리 하죠.”
술 연기로 떴고, 술 팔아 먹고사는 사람치고는 조금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렇다면, 결혼 10년만인 1995년 가족을 머나먼 미국으로 떠나보낸 30년 기러기아빠는, 무엇으로 기나긴 허전함을 달랬을까.... 식당일과 함께 그의 삶에 버팀목이 되어준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그림이다. 취미를 넘어 초대 개인전까지 개최한 화가로서의 삶이 그의 또 다른 모습이다.

당시 정명재는 30cm 자 위에 남자와 여자, 할머니, 장애인 등을 그려넣고 ‘잣대를 놓고 보면 인권이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카피를 달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고. 그 작품은 캘린더로도 만들어져 집에 왔다고 한다. 단골 손님들의 생일에 그림을 그려주는 식당주인으로도 소문난 정명재가 정식 화가로의 입문하는데 징검다리가 되어준 이는 압화(꽃과 잎을 눌러서 말린 그림)로 유명한 도주현 작가다.

“스승도 제자도 없습니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지요. 그러다보니 재료 사용이 제일 난감한 과제였는데, 그런 면에서 유튜브가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현재 저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은 그림 그리고 있는 혼자만의 시간입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인사동과는 인연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소중한 인연, 그리고 내 그림을 사랑하는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화선지와 캠퍼스 위를 걷고, 지칠 무렵이며 붓을 꼭 끌어안고 단잠에 빠집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연기가 하고 싶어졌다. 개그가 아니라 연기다. 자신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가령 포장마차 주인과 같은 역할. 쭈뼜쭈뼜한 연인이라든지 연예인이 왔을 때 술 취한 목소리로 서빙하며 ‘둘이 사귀시나요’ ‘잘 어울리네요’라며 극의 감칠맛 역할을 하는 배역말이다. 굳이 전례를 들자면, ‘한지붕 세가족’의 최주봉이랄까? 그렇게 무대에서 내려온 정명재는 우리 주변에서 작은 꿈을 꾸며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writer 유성욱 photo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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