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유명한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의 말이다. 사실 예술과 외설시비에 가장 자주 휘말리는 장르는 단연 영화 쪽이다. 어쩌면 소설이 상상에 의존하는 예술이라면 영화는 보다 직접적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외설시비로 시끄러웠던 영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우연히 빈 집에서 맞닥뜨리게 된 낯선 남녀가 다짜고짜 격렬한 정사를 벌이는데, 이 장면이 가히 파격적이다.
사실 관객은 왜 이들이 만나자마자 키스를 퍼붓고 대뜸 정사까지 이르게 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영화평에 ‘소외된 현대인의 파행적인 인간관계를 변태적이고 충격적인 성행위 묘사를 통해 그려냈다’고 되어 있으니, 아 그런가 보다 유추할 따름이다. 이 영화는 수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지만 우리들로선 이 야한 영화가 그 정도로 훌륭하다는 데에 의아할 뿐이다. 예술과 외설은 대체 어디까지가 경계란 말인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만든 ‘감각의 제국’이란 영화가 있다. ‘예술이 되어버린 포르노그라피’라는 문구를 영화카피로 사용했는데, 정사장면이 이토록이나 길게 들어간 영화도 드물 것이다. 포르노그라피적이면서 일본 영화 특유의 엽기적이기까지 해서 국내에서는 뚜껑조차 열지 못하고 있었다. 24년이 경과한 2000년에야 개봉되었는데, 삭제되거나 모자이크처리가 된 탓인지 흥행에 성공한 것 같진 않다.

식음을 전폐하고 서로에게 탐닉하지만 합일되지 않는 육체의 한계를 느낀 여자가 남자를 교살한다. 그리고 남자를 영원히 갖기 위해 성기를 잘라 간직한다. 이 영화 또한 포르노인지 예술인지 우리로선 헛갈리기만 하는데, 서구의 많은 평론가들은 기꺼이 이 영화를 오시마 나기사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외설인지.
이안 감독의 ‘색,계’는 ‘숨 막히는 20분, 무삭제 개봉’이란 카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 단지 무삭제 상영된다는 20분 때문에 영화관을 찾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 차례에 걸친 정사장면이 있는데, 탕웨이의 체모와 양조위의 성기가 노출된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입을 모아 이 영화가 외설이 아닌 예술이라 말한다. 영화평론가가 아닌 일반 관객들이 그렇게 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을까.
미술 쪽으로 가보자면, 온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나 에곤 실레도 한때는 외설시비에 시달렸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들의 그림을 보려고 빈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예술가들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전위작가로 칭송받는 마르셸 뒤샹에 대해 말해보자. 1917년 뉴욕의 한 전시회에 남성용 소변기를 떡하니 갖다놓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품했다. 있는 그대로의 변기에다 그가 한 일이라곤 ‘R.Mutt 1917’이란 서명을 한 것뿐이다. 당시 그 작품은 전시 자체를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지금은 필라델피아 미술관 같은 곳에 특별전시관을 따로 가질 정도로, 뒤샹은 현대미술을 얘기할 때 제일 먼저 거론되는 신화 같은 존재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예술과 외설을 칼로 무 자르듯 가르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어떨까.
보고나서 마음에 변화가 생기면 예술, 몸에 변화가 생기면 외설.
보고나서 눈물이 나면 예술, 군침이 돌면 외설.
볼륨을 키우면서 보면 예술, 줄이면서 보면 외설.
외설이라 광고하면 예술, 예술이라 광고하면 외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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