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길종은 김지하와 빈번한 서신왈애를 통해 동학혁명을 주제로 한 ‘태인전투’라는 제목의 영화를 구상하기도

[스마트시니어뉴스=신성식 기자] 1979년 2월 23일 서울 충무로에는 온종일 진눈깨비가 내렸다. 하길종 감독은 자신의 일곱 번째 연출작 ‘병태와 영자’에 몰려드는 관객들을 보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지켜 보라구, 내 영화작업은 이제부터 시작되니까.” 그러나 그는 풀썩 땅바닥에 쓰러졌고 닷 새 뒤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고혁압에 따른 뇌졸중. 한 많은 영화광의 38년 짦은 생애였따.
하길종의 대학생활 4년은 기행과 실험 - 지가성찰의 나날이었다. 김지하, 김승옥, 주섭일, 김송현 등과 함께 ‘문리대 거지그룹’을 탄생시켰고 교내 영화상을 만들어 신성일에게 ‘최악의 연기상’을 주기도 했다., 신인 발굴에 큰 차질을 빚게 했으며 스타란 잘 생겨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주었다는 이유였다. 어느 해인가는 머리를 박박 밀고 계룡산으로 잠적하더니 ‘태를 위한 과거분사’ 라는 시집을 펴냈다. 암호문을 조립한 듯한 시는 앙드레 브르통을 빰칠 정도였다.

1964년 에어프랑스 항공사에 근무하던 하길종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기회의 땅이라지만 맨주먹 뿐인 동양 청년에게는 한 밤중에 혼자서 내리는 외딴 종착지나 다름 없었다. 하길종은 돈이 될 만한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웨이터, 청소부, 주유소 일꾼을 거쳐TRh 심지어 장의사 직원이 되어 손바닥에 끈적끈저 옮겨붙는 추깃물을 닦아냈다. 일년이 넘는 고생 끝에 하길종은 드디어 명문 ucla 영화과에 입합했다. 훗날 대부를 찍게 된 프란시스 코폴라가 1년 선배였다.
하길종은 김지하와 빈번한 서신왈애를 통해 동학혁명을 주제로 한 ‘태인전투’라는 제목의 영화를 구상하기도 했다. 전채린과 결혼하여 얻은 아들 지현은 더없는 기쁨이었다. 하길종은 졸업작품 ‘병사의 제전’으로 MGM 영화사가 전 미국 영화과 학생 가운데 4명을 선발하여 주는 ‘메이어 그랜드상’을 받았다. UCLA 강사 자리가 보장되었고, 할리우드의 거대한 시스템도 유혹적이었으나 하길종의 결심은 단호했다. 기다려라. 약속대로 나는 간다. 잠든 그대들을 내가 깨우겠다. 황홀한 이륙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양화계는 불활의 수렁에 깊이 빠져 들었다. 국군 총 한방에 인민군 너댓명이 쓰러지는 반공영화와 새마을 찬가를 목놓아 부르는 계몽영화. 홍등가를 들락거리는 작품들로 주류를 이루었다. 하길종의 1975년작 ‘바보들의 행진’에서 야만의 유신시대 젊은이들의 추락한 꿈과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 저리도록 그려 냈지만 이 영화 역시 무참하게 난도질당했다. 잘려나간 필름은 지금 한 토막도 남아있지 않다.
이장호, 김호선, 홍파 감독 등과 ‘영상시대’를 결성한 하길종은 영상 게릴라로 변신했다. 검열관들과도 열심히 싸웠다. 말이 싸움이지 재떨이에 얼굴이 찢겨나가고 시퍼렇게 멍든 쪽은 하길종이었다. “하길종 감독은 마치 돌풍을 몰고 오는 사람 같았다. 그는 한국영화가 외면당하던 시절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우리 영화를 주목받게 만든 감독이었다. ”고 임권택 감독은 회상한다.

하길종은 교수이자 평론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뿌리깊은 나무’에 고정으로 기고한 비평은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놀리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누에 불을 켠 적들이 속출했는데 혹평에 분개한 어느 감독은 주먹부터 날렸다. 누군가 그랬다. 하길종은 영화계 기존세력과 낼랭한 관객, 그리고 숨막히는 사회로부터 매만 맞다 떠났다고. 하길종은 ‘병태와 영자’를 보며 끄억끄억 울었다. 하면에 4.19의 합성과 잊혀진 남만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20대로 돌아간 하길종은 시대증언과 인간 탐구에 역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영화 천재와 요절을 등식으로 묶어놓고 말았다. 하길종이 타계한 이듬해에 수필집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과 평론집 ‘사회적 영상과 반사회적 영상’이 출간되었다.

“한국영화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완전한 혁명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땅에 영화를 예술의 차원에서 다시 식목하는 작업이다. 모든 예술행위가 그렇듯이 인간의 편에 서 있지 않는 작품은 일체가 사이비다. 정부도 그렇고 영화는 더욱 그렇다.”
하길종 감독이 남긴 마지막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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