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늘 수프 속으로 들어간 추억 한자락
나는 마늘 하면 단군신화의 호랑이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생각난다. 우리는 시골에 살면서 인근에서는 처음으로 특용작물을 재배했다. 지금은 특용작물 재배가 보편화되었고, 특용작물을 재배해야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1970년경에는 특용작물은 극히 일부 지역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재배했다.
우리는 아버님께서 1965년경에 고추를 300평 정도 심었다. 그랬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무척 욕을 먹었다. 고추를 도대체 얼마나 많이 먹으려고 그렇게 많이 심었냐고 핀잔 듣기가 일쑤였다. 당시에는 대도시 근교를 제외하고는 자급자족할 정도만 심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고추를 판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때였기 때문이다.그런데 그해에 전국적으로 고추가 흉년이 들었고, 우리의 고추 농사는 풍년이 들었다. 고추를 말리느라고 방에도 널어놓았다. 우리는 잠을 자려면 고추를 한쪽으로 밀고 고추 속에서 잠을 잤을 정도였다.

아버님은 고추를 팔지 않고 겨울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른 봄에 팔았다. 고추금이 비싼데도 팔지 않고 기다렸다가 팔았다. 가을보다 고추금을 무려 세배나 더 받고 팔았다. 고추를 판 돈으로 논을 닷 마지기나 샀다.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의 눈이 돌아가기 시작하여 너도나도 고추를 심었으나, 다음 해에는 과잉생산되어 고춧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고추에 이어 마늘 농사에 도전
우리 집은 다시 마늘에 도전하였다. 마늘을 천 평을 심어 작황이 좋아 첫해 농사를 지어 마늘 판 돈으로 다시 논을 닷 마지기나 샀다. 1970년으로 기억되는데, 그해에 마늘값이 폭락하였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청주까지 마늘을 가져와 리어카에 싣고 다니시면서 직접 팔러 다니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인 셈이다. 이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성과 구시가지 사이를 흐르는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 난간에는 왕비의 고해성사에 대한 내용을 묻는 왕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아 죽임을 당한 신부의 동상이 조금 훼손된 채로 서 있다. 반대편에는 예수의 동상이 역시 조금 훼손된 채 서 있다. 원래의 동상은 카를교에 있다고 하니 이따 저녁때 카를교에서 보자. 그런데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왕이 캐물었을까? 신부가 고해성사의 내용을 말하지 않는 것은 원래 말하면 안 되도록 되어 있으니 이해가 되지만, 왕이 끝까지 캐물은 것은 아마도 커다란 이유가 있을 것인데, 가이드가 더 이상은 모른다고 한다.

곰이 살고 있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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