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 박정하의 일상과 생각, "또 한 번의 설날을 기다리며"

박정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6-02-12 07: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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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피천득 선생은 수필 ‘설날’에서 세수하고 새 옷을 갈아입을 때 느끼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기분’을 노래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설날은 새 옷의 설렘보다 교통 체증이나 휴식의 의미가 더 크지만, 그럼에도 ‘다시 새로워지고 싶다’는 마음만은 여전히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설을 준비하는 일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고, 나는 그저 집안이 분주해지는 풍경을 슬쩍 지켜보며 즐기는 쪽에 가까웠다. 기억 속의 어린 시절 설은 참 느렸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영일만 바닷가의 작은 도시, 포항이다. 설날이나 추석날 아침이면 아버지와 나는 늘 이십 리쯤 떨어진 ‘양덕 골’ 큰집으로 차례를 지내러 갔다. 새벽같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지금이야 차로 십 분이면 닿을 거리지만, 그때는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을 걸어 넘어야 했다. 눈이라도 내린 다음 날이면 길은 질퍽한 흙탕길이 되었고, 찰흙처럼 들러붙은 흙 때문에 몇 걸음만 걸어도 발이 무거워졌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는 아팠다. ‘아직도 멀었나’ 투덜거리며 고개를 넘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도 설은 늘 기다려졌다. 큰집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 부치는 냄새와 떡 내음, 사촌들의 웃음소리, “많이 컸네” 하고 등을 두드려 주던 어른들의 손길. 그 속에 서 있으면 아까의 고된 길은 거짓말처럼 잊혔다.

 

돌아보면 설은 힘들게 가서 더 반가운 날, 그래서 더 따뜻한 날이었다. 요즘 사람들에게 설은 조금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막히는 고속도로, 부담스러운 인사, 쉬지 못하는 연휴. 젊은 세대에게 명절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는 말도 이해가 간다. 그래서 나는 ‘예전처럼 해야 한다’는 말을 굳이 하고 싶지 않다. 전통은 같은 모양으로 남아 있을 때보다, 각자의 삶 속에서 새롭게 숨 쉴 때 더 오래가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 하나쯤은 남았으면 좋겠다. 잠깐 멈춰 서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그리운 사람의 안부를 묻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는 하루.
 

“그래, 우리 모두 올해도 여기까지 잘 왔구나.”
 

서로에게 그렇게 말해 줄 수 있는 시간. 떡국 한 그릇에 담긴 의미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나는 문득 한 제자를 떠올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지금은 김해의 I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역 음악계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성악가. 은퇴 전 나와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던, 내게는 자랑스러운 제자다. 

지난해 스승의 날, 그는 정성 어린 인사와 함께 뜻밖의 용돈을 보내왔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한참 동안 5월 하늘을 올려다보며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돈을 쓰지 못하고 신권으로 바꿔 봉투에 담아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액수로는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을 앞둔 오늘, 그 봉투를 다시 꺼냈다. 제자의 마음 위에 내 마음을 조금 보태어, 손주 같은 그의 아들에게 설빔 한 벌 해 입히라고 보냈다. 직접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대신하는 작은 인사였다.

생각해 보면 이것 또한 설이 우리에게 베푸는 다정한 마법인지도 모른다. 잊고 지내던 사람을 불쑥 떠올리게 하고, 미뤄두었던 안부를 건네게 하고, 느슨해진 인연의 매듭을 다시 묶어 주는 일. 이제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은 서글프기보다 고맙다. 또 한 해를 무사히 건넜다는 뜻 같기도 하고, 아직 서로의 안부를 물을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증표 같기도 해서.

다가오는 설에는 작은 다짐 하나만 하려 한다. 조금 덜 욕심내고,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 차가운 겨울 공기 끝에 엷은 봄기운이 스민다. 또 한 번 설이 온다. 지나온 길에 대한 감사를 담아, 조용한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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