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오늘은 광복절이다. 며칠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어느 유명 여배우의 증조부이자 일제강점기 시절 의사였던 한 인물의 친일 논란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가족사를 들먹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시절의 의사'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또 한 사람의 의사가 떠올랐다.
“누구의 인생에나 신이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말이다. 얼마 전 이 구절을 깊이 새기게 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만났다.

1894년 무렵, 조선의 한 백정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름은 박성춘. 갓을 쓸 수도, 호적에 제대로 이름을 올릴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죽어가던 그를 찾아온 사람은 놀랍게도 고종의 시의(侍醫) 이자 제중원 의사였던 올리버 에비슨이었다. 왕의 몸을 진료하던 의사가 가장 천한 백정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치료한 것이다. 에비슨의 손에는 신분의 구별이 없었다. 그저 아픈 사람이 있었고, 의사가 있었을 뿐이다. 박성춘에게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이 있었다면 바로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에비슨이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왕의 몸을 만지던 손이 백정의 몸에 닿았다는 것, 그것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당신도 사람입니다”라는 가장 강력한 선언이었을 것이다.
병에서 살아난 박성춘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평생 '백정'이라는 이름 속에 갇혀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당시 곤당골교회(현재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에 나가 신분 차별에 맞섰고, 자신과 같은 백정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존엄을 받은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에게 존엄을 건네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1898년 10월 29일, 종로에서 열린 관민공동회. 수많은 사람들 앞에 한 백정이 섰다. 박성춘이었다. 그는 자신을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라 부르면서도, 나라를 이롭게 하는 일에는 관민이 마음을 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허리를 굽혀야 했던 사람이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 순간이었다. 이야기는 그의 아들 박서양에게로 이어진다. 며칠 전 읽은 기사 속 인물인 의사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그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했다. 어릴 적 봉출이라 불리던 백정의 아들은 아버지와 에비슨의 인연으로 의학의 길에 들어섰고, 1908년 세브란스 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가 되었다. 면허 번호는 3번이었다. 이후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1917년 안정된 자리를 내려놓고 북간도로 향했다. 그곳에서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의 군의(軍醫)로 활동했다.

아버지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웠고, 아들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어 민족의 독립에 삶을 바쳤다. 나는 이 이야기의 본질이 단순한 신분 상승이나 성공 신화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차별의 대물림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받은 손길이 아들에게 의술이 되었고, 아버지가 되찾은 존엄이 아들의 교육이 되어 다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
몇 달 전 읽었던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속의 한 문장처럼, 정답을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에비슨은 백정을 치료하는 손으로, 박성춘은 관민 공동회의 목소리로, 박서양은 사람을 살리는 삶으로 만민 평등이라는 정답을 증명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8월 15일, 우리는 이날을 나라를 되찾은 날, 광복절이라 부른다. 하지만 올해 광복절에는 또 다른 광복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한 사람이 자기 이름을 갖는 것.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것. 태어난 신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받은 존엄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것. 어쩌면 광복은 한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따뜻한 눈과 차별 없는 작은 손길에서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는 나라를 되찾는 일이 광복이었겠지만, 한 사람의 존엄을 빼앗긴 시대에는 그 존엄을 되돌려주는 것 또한 광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 8월 15일에는 나라를 되찾은 기쁨뿐 아니라, 사람이 사람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꺼이 손을 내밀었던 이들도 함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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