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눈물을 닦아준 영재 이건창(李建昌)을 찾아서
[욜드(YOLD)=김윤찬 기자]매서운 바람이 불던 조선 후기, 탐관오리의 횡포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한숨을 거두어준 이가 있었다. 민간인으로 위장해 팔도를 누비며 부패를 척결했던 암행어사(暗行御史)이자 강화학파의 거두였던 영재(寧齋) 이건창(1852~1898)이다. 약 143년 전, 혼란기 속에서 빈민을 구제하고 강직한 애민 정신을 실천한 그를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스스로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곳곳에 남아있다.서울 송파구와 인천 모도, 그리고 그의 숨결이 남아있는 강화도 현장이다.
백성의 고초를 온몸으로 껴안은 송파 장터의 '행어사'
가장 먼저 발걸음을 향한 곳은 서울 송파구 송파1동 송파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송파근린공원이다(KakaoTalk_20261003_121827345.jpg). 공원 한편에는 1925년 큰 장마 피해를 기록한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와 나란히 서 있는 '이건창 영세불망비'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본래 송파라는 지명은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선리 일대에 있던 마을로, 1647년 장마로 떠내려간 뒤 주민들이 현재의 석촌호수 일대로 이주하며 불리게 된 이름이다. 이건창은 신분을 숨긴 채 이 송파 장터를 찾아 백성들의 팍팍한 삶과 어려움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흥미로운 점은 전국에 세워진 다른 비석들과 달리, 이 비석에는 숨길 암(暗) 자가 빠진 '행어사 이공건창 영세불망비(行御史李公健昌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지역에서는 신분을 당당히 드러내고 백성들의 고초를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즐거운 사학적 추측을 해보게 된다. 1883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홍수에 휩쓸려 사라졌다가, 1979년 향토사학자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과중한 세금에서 섬마을을 구하다, 인천 모도의 불망비발길은 인천 옹진군 북도면 모도(茅島) 마을로 향했다. 섬마을 도로 옆, 소박하지만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도 암행어사 불망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 비석은 1885년(을유년) 6월에 건립되었다.
폐의파립(낡은 옷과 찢어진 갓)으로 위장한 채 마패를 들고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며 탐관오리를 벌벌 떨게 했을 이건창의 기개가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당시 외딴섬 모도의 주민들은 배(선박)에 부과된 과중한 세금과 무거운 부역으로 인해 실상을 눈 뜨고 못 볼 지경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이건창은 즉각 조정에 건의하여 세금과 부역을 면제토록 조치했다. 생의 의욕을 되찾고 다시 살림이 풍요로워진 섬마을 사람들은 경기도 암행어사 활동을 마친 이건창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 비문 좌우에 새겨진 '지부강직 익감중역(持斧剛直 鷁減重役)', '혜급도빈 뢰이영신(惠及島濱 賴以永新)'이라는 글귀에는 그의 대쪽 같은 성품과 섬 전체에 미친 깊은 은혜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강화학파의 거두이자 조선의 천재 문장가, 영원히 기억되다비의 주인공인 이건창은 백헌 이경석의 형인 석문 이경직의 후손으로, 정치와 학문에서 굵직한 위치를 차지했던 명문 전주 이씨 집안에서 1852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조상 대대로 강화도에서 살아왔다. 다섯 살 때부터 문장을 지었을 만큼 타고난 천재였던 그는 고종 3년(1866년) 불과 15세의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다. 나이가 너무 어려 바로 등용되지 못했을 정도다. 고종 11년(1874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며 이름을 떨쳤고, 이듬해 충청우도 및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26세부터 본격적으로 횡포를 적발하고 백성을 구제하며 조선 후기 가장 유명한 암행어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그의 뿌리와 마지막 흔적은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에 위치한 그의 생가에는 '명미당(明美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그의 기품을 대변해 주고 있다.
평생을 꼿꼿한 지식인이자 애민을 실천하는 관료로 살았던 그는 1898년, 향년 46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 양도면 건평리에 고이 잠들었다(8218.jpg).
이건창의 흔적을 쫓은 이번 탐방은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벼슬의 높고 낮음을 떠나 진정으로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던 그의 위민(爲民) 사상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무거운 울림을 준다.


시간이 지나도 결코 바래지 않을 그의 올곧은 가치는 1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석의 이름처럼 우리 가슴속에 '영세불망(永世不忘)'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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