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양에 가면 늘 들르는 곳이 있다. 시장 안 작은 식당에서 파는 감자옹심이. 벌써 2년 만의 방문이다. 화려한 음식은 아니다. 투박한 모양에 간도 삼삼하다. 그런데 그 소박함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자극적인 맛은 금세 잊히지만, 담백한 맛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다시 불러들인다.
어쩌면 사람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다. 오래 남는 것은 화려함보다 담백함이다. 식사를 마치고 바다로 향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잔잔한 풍경 대신 높은 파도가 쉼 없이 밀려왔다. 회색 하늘과 검푸른 바다는 서로를 닮아 있었고, 거센 파도는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하얀 숨을 토해냈다.
사람들은 맑은 바다를 좋아하지만, 나는 비 오는 동해를 좋아한다. 거친 파도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씻어주는 힘이 있다. 자연은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거칠게 우리를 흔들어 놓으며 살아 있음을 일깨워 준다.
동해안 낭만가도를 따라 고성까지 천천히 차를 몰았다. 길은 바다를 따라 이어지고, 바다는 묵묵히 길을 따라왔다. 중간에 만난 작은 힐링테라스에 차를 세웠다. 바다를 향해 놓인 벤치, 젖은 나무 데크, 그리고 파도 소리. 그곳은 그 어떤 유명한 카페보다 좋았다. 커피는 없어도 풍경이 있었고, 음악은 없어도 파도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자연은 언제나 입장료 없는 최고의 공연장을 준비해 둔다.

돌아오는 길, 미시령 정상에 오르자 세상은 온통 안개였다. 아래에서는 산을 덮은 구름을 바라보았는데, 정상에 서니 내가 그 구름 속에 들어와 있었다. 문득 웃음이 났다. 산 아래에서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는데, 여기서는 내가 구름 속을 달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옛사람들이 높은 산에서 신선을 떠올렸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만 다른 높이에서 바라보아도 같은 풍경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안개를 지나 산을 내려오니 인제의 스마트복합쉼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서 마주한 소양호는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동해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다는 쉼 없이 움직이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호수는 한곳에 머물며 하늘을 품는다. 하나는 역동의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기다림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종종 앞으로만 나아가는 삶을 성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호수처럼 머물며 주변을 비추는 시간도 필요하다. 바다가 내게 용기를 준다면, 호수는 내게 평안을 준다.
오늘 하루는 바다에서 시작해 구름을 지나 호수에서 끝났다. 돌아보니 여행은 멀리 가는 일이 아니었다. 같은 나라도, 같은 하늘도, 같은 하루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때 전혀 새로운 세상이 된다.
음악도 그렇다. 같은 악보를 수없이 지휘했지만, 어느 날은 파도처럼 들리고, 어느 날은 안개처럼 스며들며, 또 어느 날은 호수처럼 고요하게 가슴에 머문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떠난다. 새로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 오늘의 음악 / 펠릭스 멘델스존 – 《핑갈의 동굴(Fingal's Cave) 서곡, Op. 26》
거친 바다의 파도와 깊은 울림, 그리고 여행자의 설렘을 가장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다. 멘델스존 역시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를 여행하던 길에 핑갈의 동굴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이 곡의 첫 선율을 떠올렸다고 전해진다. 여행이 선물한 악상이라는 점에서, 이 곡은 오늘 동해의 파도와 미시령의 구름, 그리고 소양호의 고요함까지 이어지는 하루의 정서를 담아내기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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