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iversary / 1973년 7월 23일, 수원에 홍난파 노래비가 세워진 날 "민족음악가의 <고향의 봄>은 오는가?"

김재호 기자 / 기사승인 : 2026-07-23 16: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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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욜드(YOLD)=김재호 기자] 수원시 팔달산을 내려오는 성곽 옆에는 '홍난파' 선생의 노래비가 서있고 그 비에는 <고향의 봄>가사가 새겨져 있다. <고향의 봄>과<봉선화>의 작곡가로 유명한 난파 '홍영후'는 분명 우리 근대음악계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기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민족음악가로 불리고 있다. 또한 대다수 사람들은 홍난파가 독립운동단체인 ‘수양 동우회’의 단우로 흥사단 단가를 작곡하는 등 음악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펼쳤으리라 생각하였고, 또 그것이 정부를 비롯한 각계의 인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가가 있는 화성군과 수원시가 홍난파 생가 정비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음악회를 개최하고자 했을 때 많은 논란을 겪었던 적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바와는 달리 일제 강점기 때의 그의 음악활동은 <장성의 파수>, <공군의 노래>, <태평양 행진곡>, <희망의 아침>등의 노골적으로 일본천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친일가요를 만들었고 일본의 내선일체, 황국신민 정책의 음악적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

홍난파는 누구인가

작곡가 '홍난파'는 경기도 화성군 출신으로 한국근대 서양음악의 선구자이다. 그는 당시 일반인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본 유학에 이어 미국 유학을 마치고,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소설가, 음악교육가 등 다양한 활동을 했던 음악인이다. 또한 1920년 한국최초의 예술가곡인 <봉선화>를 작곡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는 도쿄 유학을 중단하고 자기의 바이올린을 저당 잡힌 돈으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한 음악인이었다. 그러나 1937년 이후에는 '모리까와 준'(森川 潤)이라는 창씨개명으로 친일 가요와 글을 발표하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1991년 2월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된 이후, 반민족 행위자로 지금까지 역사적 심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홍난파가 친일파니 아니니 논란을 벌이기 이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예술과 사상은 별개의 시선으로 예술가는 예술로 평가하고 사상가는 사상으로 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가이사(로마 황제)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마가복음 12장 13-17절)고 말하였듯이 어떠한 평가에도 그것에 걸맞은 분명한 기준이 꼭 있어야 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박지성' 선수에게 음악도 못하면서 축구만 잘하면 무엇 하냐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둘째, 인물을 평가할 때는 반드시 그 시대적 배경을 함께 봐야 한다. '홍난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1941년)등 10여 년간 계속 전쟁을 치르고 패전국이 되었던 때로 무력(武力)앞에서는 무력(無力)해질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지금이야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민족적 자긍심만은 지켜야 했었다고 말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셋째, 모든 평가는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를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인물을 평가하는데 공적인 업적과 과오가 있다면 모든 정보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게 맞는 방법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진 정보는 최소한의 부정도 할 수 없게 만든다.  

'홍난파' 그를 ‘민족주의적 영웅’으로 떠받드는가, 아니면 ‘친일음악가로서의 단죄’를 해야 하는가의 극단적인 차원으로 몰고 가기에는 지나치게 편협함을 지닐 수 있다. 비록 80년대 이전의 연구가 객관적·실증적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홍난파의 업적을 부풀린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봉선화>,<고향의 봄>을 작곡했음은 물론이고, 수많은 가곡들을 통해 그의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으로 근대 여명기의 양악사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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