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 말은 사라져도 글은 남는다

박정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6-10-13 16: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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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EBS에서 한글날을 맞아 방영한 영화 <말모이>를 보았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라 언젠가 한 번 꼭 보고 싶었는데, 가을밤에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 며칠 전 나는 블로그에 <난생처음 우리말을 낯설게 들은 날>이라는 글을 썼다. 40년 전 빈에서 한스 호터 교수의 말을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달았던 경험을 담은 글이었다. 그 글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말은 공기 중으로 사라지지만 글은 남는다.’

영화 <말모이>는 이 문장이 지닌 의미를 전혀 다른 깊이와 차원에서 보여주었다.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남은 언어의 아름다움을 넘어, 한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애썼던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였다. 영화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대다. 우리말 사용마저 억압받던 시절,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영화는 실제 사전 편찬 활동을 바탕으로, 글을 모르는 극장 심부름꾼 김판수와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의 만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처음 판수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아들의 학비를 마련해야 했고, 당장 먹고사는 일도 막막했으니 사전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말을 모은다는 사람들의 일이 그로서는 좀처럼 이해될 리 없었다. 그런 판수가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글자를 하나씩 깨치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데 그치지 않았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며, 자기 삶을 새롭게 이해하는 일이기도 했다. 판수의 변화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평범한 일이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은 전국 각지의 말을 모으는 일이다. 지역마다 다른 말씨와 사투리, 사람들의 입에 자연스럽게 붙어 있던 정겨운 표현들.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상에서 쓰는 말이었겠지만, 그것을 모으는 사람들에게는 단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언어의 조각들이었다. 한 사람의 말은 작고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그 말들이 모이면 한 지역의 숨결이 되고, 한 민족의 기억이 된다. 그렇게 모인 말들이 마침내 ‘사전’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귓가에 남은 대사가 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다. 누군가는 말을 모으고, 누군가는 그것을 기록하며, 또 누군가는 원고를 지킨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몫의 한 걸음을 보태야 비로소 하나의 큰일이 이루어진다. 우리말 사전도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름난 학자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일상에서 쓰는 말을 보태고, 함께 기록하고, 끝까지 지켜낸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었다. 영화는 그 과정에 드리운 위협과 희생도 보여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사전 원고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과 글이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일깨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한글은 너무나 익숙하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고, 블로그에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살아간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말을 글로 옮길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대게는 잊고 지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익숙한 일이 평생의 과제였고, 어떤 시절에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영화를 보며 새삼 생각했다. 40년 전 빈에서 하이네의 시를 우리말로 낭송하고, 오늘 내 삶과 생각을 한글로 적어 남길 수 있다는 것.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날 빈에서 한스 호터 교수는 우리말의 소리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통해 평생 사용해온 언어를 새롭게 들었다. 그리고 영화 <말모이>는 그 아름다운 말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고 기록해온 사람들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한쪽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한 한 젊은 성악도의 기억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 말을 지켜내려 했던 사람들의 역사가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 같지만, 두 이야기는 결국 우리말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어져 있었다.

말은 공기 중으로 사라지지만 글은 남는다. 글이 남아 있기에 우리는 오래전 누군가의 생각을 읽고, 그리움을 느끼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록해 누군가와 나누는 일, 그 작은 나눔이 누군가에게 온기로 전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마음을 담아 한글로 글을 쓴다. 내가 누리는 이 고운 말을,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건넬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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