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헬싱키 공항에서 만난 하얀 철학자

박정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6-07-26 18: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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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몇 년 전 팬데믹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몇 해 동안 해외여행을 꿈도 꾸지 못하다가 더는 미룰 수 없겠다는 마음으로 배낭 하나 메고 핀란드와 발트 3국 여행길에 올랐다. 입에는 아직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공기가 남아 있었다. 원래 아홉 시간 남짓이면 닿을 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하늘길마저 바꾸어 놓았다. 비행기는 남쪽으로 크게 우회했고, 열네 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내린 첫 기착지가 헬싱키 공항이었다.

공항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무민 숍이었다. 하얗고 둥글둥글한 인형들이 열기구를 타고 공중에 떠 있었고, 선반마다 크고 작은 무민들이 여행객들을 맞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종종 보던 인형이었다. 하마를 닮은 듯한 뭉툭한 얼굴, 볼록한 배, 보송보송한 순백의 몸. 어딘지 모르게 순하고 천진한 표정까지 더해져 처음 보는 사람도 금세 마음이 풀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름이 무민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솔직히 '무민'이라는 이름도 어딘가 낯설었다. 글쎄, ‘무민’이라는 이름은 내 귀에는 어딘지 한자어처럼 들리기도 했고, 일본에서 자주 봤던 기억 때문에 일본 캐릭터쯤으로만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공항을 나와 헬싱키 시내를 걷다 보니 무민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기념품 가게에도, 서점에도, 카페에도 있었다. 어느새 '아, 이 나라 사람들은 이 캐릭터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이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무민은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에 탄생시킨 캐릭터였다. 정부가 국가 캐릭터로 지정한 것도 아닌데, 자연과 가족, 평화와 자유를 담고 있는 이야기 덕분에 어느새 핀란드를 대표하는 문화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하얀 인형은 단순한 봉제인형이 아니었다. 한 나라 사람들이 오래도록 품어 온 삶의 방식이었고,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귀국 후 무민 시리즈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주인공 무민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스너프킨이었다. 낡은 초록 코트와 모자, 배낭 하나를 메고 계절 따라 여행하는 방랑자. 그는 무엇인가를 소유하려 하지 않았고, 누구를 지배하려 하지도 않았다. 친한 친구와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고,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 음악을 만들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런 삶이 조금은 외로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스너프킨은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젊을 때의 고독은 세상 속에서 나를 찾기 위한 시간이지만, 노년의 고독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제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된다. 잃어버린 것을 붙잡기보다 남아 있는 것들을 고맙게 바라보는 시간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스너프킨을 볼 때마다 '고독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고독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것을 내려놓는다. 젊은 날의 꿈도, 욕심도, 계획도 조금씩 현실과 화해한다. 처음에는 그것을 타협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그것이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스너프킨 역시 세상을 모두 가질 수 없음을 알기에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헬싱키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하얀 인형 하나가 내게 이런 생각까지 안겨 줄줄은 미처 몰랐다. 여행은 늘 새로운 풍경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여행은 풍경보다 먼저 한 캐릭터를 만나고, 그 캐릭터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한다. 나에게 무민은 귀여운 인형이 아니라, 스너프킨이라는 조용한 철학자를 만나게 해 준 작은 안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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