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 일상과 생각 / 헬싱키 공항에서 만난 하얀 철학자 (2) "스너프킨은 왜 배낭 하나만 메고 떠났을까"

박정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6-07-29 18:40:37
  • -
  • +
  • 인쇄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헬싱키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무민의 이야기를 더 찾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읽을수록 내 마음을 오래 붙잡은 것은 주인공 무민이 아니라 그의 친구 스너프킨이었다. 처음에는 그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방랑자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여행이 아니라 '소유하지 않는 삶'이었다.

스너프킨이 가진 것은 참 단출하다. 낡은 초록 모자와 오래된 코트, 작은 배낭 하나, 그리고 하모니카. 집도, 재산도, 명예도 없다. 겨울이 오면 미련 없이 떠나고, 봄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친구들에게 돌아온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누구도 얽어매려 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깊이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은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조금도 가난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보다 여유로워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무언가를 많이 가져서가 아니라, 더 이상 가질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우리는 평생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살아왔다. 더 큰 집,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 그것이 삶을 든든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젊은 날에는 가족을 책임져야 했고, 아이들을 키워야 했으며, 불안한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었기에, 그 믿음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의 계절이 바뀌고 노년의 문턱에 서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해 애쓰는 동안, 정작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마음의 평온과 여유, 그리고 사람과의 진정한 온기를 놓치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무언가를 움켜쥐지 않아도 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스너프킨은 세상이 말하는 '놓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소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스스로의 고요를 지켜 낸다. 요즘 말로 하면 '놓침의 기쁨(Joy of Missing Out)'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세상과 조금 거리를 두는 대신 자신의 평온을 잃지 않는 삶 말이다.

그는 아무것도 갖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가진 물건과 욕망이 어느새 나를 소유하도록 내버려두지는 말라고 조용히 일러주는 것만 같다. 요즘 나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짐을 조금씩 줄인다. 예전에는 혹시 필요할까 싶어 이것저것 챙겼지만, 돌아와 보면 끝내 한 번도 꺼내지 않은 물건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인생도 여행과 참 많이 닮았다. 정말 필요한 것보다,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챙겨 온 것들이 훨씬 많았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스너프킨은 배낭이 가벼워서 멀리 갈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배낭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던 사람처럼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말없이 가르쳐 준다. 이제 남아있는 내 인생의 배낭도 필요한 것만 담긴, 조금은 헐렁한 배낭으로 만들어 나가야겠다. 언젠가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날에도 스너프킨처럼 가벼운 마음 하나만 품고 떠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저작권자ⓒ 욜드(YOLD).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주요기사

+

YOLD CULTURE

+

Intervi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