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욜드(YOLD)=박정하 칼럼니스트] 아침에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단톡방에 제법 긴 글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미국의 가난한 공대생과 부잣집 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리고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한 남자가 만든 담배 브랜드 '말보로(MARLBORO)'.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브랜드 이름의 알파벳 하나하나에 숨겨진 뜻이었다.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남자는 로맨스가 끝나도 사랑을 기억한다).
읽다 보니 80년대 주말의 명화 같기도 하고, 아침 드라마 같기도 했다. 픽션의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이상하게 눈을 떼지 못한 채 끝까지 읽게 되었다. 마지막, 여자가 남긴 한 줄의 유서에서는 잠시 마음이 먹먹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감성도 잠시, 벼락같이 팩트체크 본능이 꿈틀거렸다.
"잠깐, 진짜라고?"

자료를 찾아보니, 그럼 그렇지. 역시나 100% 순도의 낭설이었다. 말보로는 애절한 첫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1924년 영국의 필립 모리스가 런던의 'Great Marlborough Street'에 있던 공장에서 처음 출시하면서 그 길 이름을 조금 줄여 'Marlboro'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진짜 역사는 오히려 그 가짜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지금은 거친 카우보이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말보로가 처음에는 여성용 담배였다는 사실이다.
'May as Mild as May(5월처럼 부드럽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립스틱 자국이 묻어도 티 나지 않도록 필터 끝을 붉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 시장에서 큰 반응을 얻지 못하자, 1950년대 카우보이 '말보로 맨'을 내세운 남성적인 이미지로 완전히 탈바꿈했고, 그때부터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브랜드 역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입어야 오래 살아남는 모양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금 속았다는 허탈함도 잠시, 이상하게 이 무해한 거짓말이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 싱거운 지명(地名)에 로맨틱한 삼행시를 얹어 세상에 퍼뜨린 그 이름 모를 연출가의 능청스러움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그 누군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런던의 오래된 거리 이름보다는, 평생 한 여자만을 그리워하다 간 남자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훨씬 더 격렬하게 흔든다는 사실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참 어쩔 수 없이 감성적인 존재다. 우리는 사실보다 이야기를 더 오래 기억하고, 숫자보다 사연을 기억하며, 팩트보다는 그 팩트가 전해주는 온기와 감정을 오래 품고 산다. 물론 세상을 어지럽히고 상처를 주는 가짜 뉴스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이런 '착한 낭설'은 세상을 팍팍하지 않게 만드는 소소한 양념이 되기도 한다. 사실만 앞세우는 세상에서도 가끔은 누군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작은 동화 한 토막에 기꺼이 속아주는 즐거움도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이 엉터리 루머 덕분에 나는 평생 관심도 없던 말보로의 진짜 역사와 런던의 길 이름까지 알게 되지 않았는가. 가짜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진짜 공부를 시켜준 셈이다. 글을 닫으며 문득 웃음이 났다. 남들은 "에이, 뭐야. 엉터리네!" 하고 단톡방을 닫아버렸을 이야기를, 나는 괜히 끝까지 붙들고 앉아 "왜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끌릴까?"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말보로도 결국 이야기로 기억되는 브랜드가 되었다. 런던의 길 이름에는 첫사랑의 전설이 덧입혀졌고, 여성용 담배는 카우보이의 신화로 다시 태어났다. 사람은 결국 상품보다 그 상품에 얹힌 이야기를 더 오래 기억하는 모양이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나 역시 그 싱거운 전설 하나를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한 편의 글로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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